2018년 6월 대한항공에서 9년간 근무하다 퇴사한 객실승무원이 급성골수성백혈병으로 산업재해를 신청했다. 국제선 승무원으로 재직하면서 겪은 잦은 야근과 과로 외에 ‘우주방사선’을 유병 요인으로 지목했다. 이후 같은 항공사 소속 승무원 3명이 비슷한 이유로 산업재해 신청을 했다. 피해자를 담당하는 김승현 노무사(노무법인 시선 대표)는 이들 말고도 18명 정도의 승무원이 우주방사선과 질병의 연관성을 문의해왔다고 전했다. 모두 암질환을 앓고 있거나 회복해 복귀한 사람들이다.
우주방사선은 우주에서 날아오는 고에너지를 가진 양성자와 전자 같은 입자를 말한다. 비행 중 이런 우주방사선에 노출된다는 사실은 국내에서도 이미 많이 알려져 있지만 건강상 위험성은 승무원의 산재 신청이 있기 전까지 크게 주목받지 못했다.
하지만 그 위험성은 이미 국제적으로 인정되고 있다. 1990년 국제방사선방호기구(ICRP)는 항공사 승무원도 방사선 관련 직종 종사자처럼 관리해야 한다고 권고했고, 세계보건기구(WHO)도 2005년 비행 승무원들의 과도한 방사선 노출을 법적으로 보호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2014년 대만 노동부는 암 발생률이 가장 높은 직종으로 승무원을 꼽기도 했다. 국내의 경우 지난 8월 강모열 가톨릭대 서울성모병원 교수·윤진하 연세대 의대 교수 연구진이 발표한 논문에 따르면 항공운송산업 종사자의 백혈병 발병률은 일반 노동자보다 1.77배 높았고, 특히 여성의 경우 2.09배 높았다.2006년 대한항공을 시작으로 국내 국적항공사들은 미국 뉴욕 등 동부노선의 귀국 편에서 주로 북극항로를 이용한다. 캄차카 항로나 북태평양을 횡단하는 노선보다 비행시간이 평균 30분에서 1시간30분 정도 짧아져 유류비용을 줄일 수 있다. 북극항로의 이런 장점은 안전상의 위험을 동반한다.
극지방은 지구 자기력선이 열려 있는 곳이라 태양풍 입자들이 직접 지구 대기로 들어온다. 게다가 양극 지역은 자기장 세기가 매우 강하다. 태양 흑점 폭발 같은 일이 벌어지면 예측하지 못한 다량의 우주방사선에 피폭될 수 있고 통신이 두절될 위험이 있다. 이런 위험성 때문에 항공사들은 국토부 운항기술기준 등에 따라 태양방사선과 지자기폭풍, 통신교란이 4등급 이상으로 예보될 경우 북극항로 운항을 금지하고 있다. 2~3등급의 경우에도 순항고도를 낮추거나 북위 83도 이상의 항로 운항을 금지하는 등의 조치를 취한다.
우주방사선의 경우 일반인의 연간 선량한도는 1밀리시버트(m㏜)이다. 인천에서 뉴욕을 북극항로로 한 번 지나갈 때 평균 0.06m㏜의 우주방사선에 노출된다. 왕복을 해도 열 차례 가깝게 다니지 않는 한 연간 기준치를 넘지 않는다.
위험을 안고 있는 이들은 항공기 승무원들이다. 이들의 연간 피폭선량은 6m㏜로 제한되는데 연간 평균 피폭선량은 3~4m㏜다. 많으면 5m㏜를 훌쩍 넘을 때도 있다. 항공사나 관계부처에서는 6m㏜를 넘은 경우는 없었다고 하지만 연구자들 사이에선 6m㏜가 넘는 사례가 있다고 보고 있다. 특히 항공사들이 사용하는 우주방사선량 예측 프로그램이 실제 값을 과소평가하고 있다는 지적이 나온다. 항공편마다 방사선 실측장비로 잴 수 없어서 예측 모델을 사용하는데 모델의 계산 값이 실제 값보다 과소평가된다는 것이다.
한국천문연구원의 황정아 박사는 “항공사가 사용하는 카리식스엠(CARI-6M)은 태양에서 오는 우주방사선을 고려하지 않고 거의 변하지 않는 은하 우주방사선만 고려한 모델”이라며 “태양 흑점 폭발과 같은 일이 발생하면 태양 우주방사선이 평소보다 2~3배, 많게는 10배까지 증폭된다”고 말했다. 이 경우 일반인들도 연간 피폭 한도를 넘을 수 있다.
이에 대해 국토부 관계자는 “근거법인 생활방사선법을 갖고 있는 원안위가 조금 더 주관을 해야 한다고 보지만 우주방사선과 승무원의 안전에 관해서는 우리가 맡고 있다”며 “원안위와 안전기준을 협의하고 실측정보도 공유하고 있다”고 말했다. 원안위는 “법령 체계를 고려하면 우주방사선 안전 관리의 실질적 주무부처는 국토부”라고 답했다. 결국 우주방사선이 끼치는 항공안전의 문제에 있어서는 국토부가 실질적인 책임을 맡고 있다고 양 부처가 동의하는 셈이다.
하지만 전문가들은 부처간에 더 적극적인 협업이 필요하다고 보고 있다. 한국천문연구원에서 태양우주환경그룹을 총괄하는 이재진 박사는 “우주방사선을 포함한 생활방사선법의 주무부처는 원자력안전위원회이고 항공운항을 관리·감독하는 곳은 국토부라 서로의 영역을 침범하지 않으려 조심스러워하는 것 같다”고 말했다.
이와 관련해 이달 중순 원자력안전위원회 산하 원자력안전기술원은 실측 조사를 비롯한 관련 연구 과제를 한국천문연구원에 제안한 상황이다. 우주방사선 문제와 관련해 국토부와 원안위, 한국천문연구원과 국립전파연구원 우주전파센터 등의 협력이 점차 가시화하는 분위기이다. 관련 부처·기관간 협의체 구성도 논의되고 있다.
이재진 박사는 우주방사선 피폭과 암 발병의 연관성을 파악하려면 10~20년의 장기 관찰이 필요하다는 점에서 승무원의 피폭량 데이터 역시 현재 5년 보관 기준을 영구보존으로 바꿔야 한다고 제안했다.
항공업계 관계자는 “승무원의 암 발생률은 일반인들의 암 발생률과 유사한 수준”이라며 “우주방사선과 암 발생의 연관성을 의학적으로 결론내리기에는 아직 이른 단계라고 본다”고 밝혔다. 산업안전보건원은 산재 신청을 한 대한항공 승무원의 근무환경을 확인하기 위해 현장에서 역학조사를 진행하고 있다. 조사는 내년 말 완료될 것으로 보인다. 김승현 노무사는 “항공사는 과학적 입증이 안 된다는 주장을 하며 버티겠지만 산업재해 인정기준은 의학적·자연과학적인 완전한 입증이 아니다”라면서 “의심이 구체적 추정에까지 이르렀다면 업무상 질병을 인정해야 한다”고 밝혔다.